내 박사 지도교수님은 벨 랩 출신이시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벨 랩에서 10년 일하시고 한국에 오셨다.

졸업하고 회사를 다닌지 1-2년쯤 됐을 무렵, 한 번은 교수님께 여쭤봤다. 당시 벨 랩은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냐고. 교수님의 대답은 “매니저들이 똑똑했기 때문이지. 좋은 사람 뽑고 좋은 일 할 수 있게 해 줬으니까.”라고 대답하셨다.

조금은 의외의 대답이었다. 뭔가 연구를 잘 할 수 있는 체계, 제도 같은 게 아니라 “똑똑한 매니저”가 답이라니. 상당히 기운이 빠졌다.

많은 조직에서 “확실한 관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MBO(Management by Objectives)를 금과옥조로 여기기 때문에 매년 MBO를 위한 목표를 수립하고, 목표 달성을 어떻게 평가할지를 적어 낸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한 해의 성과를 판단하고 인사고과를 매기며, 그 결과에 따라 승진, 연봉 인상률 등을 결정한다.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규칙을 적용한다.

제품을 기획하거나 연구를 기획할 때도 마찬가지. 모든 걸 정량화할 수 있는 잣대로 평가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고, 그걸 바탕으로 성패를 결정하고 한 해의 실적을 평가, 관리한다.

상당히 공정하고 정확해 보인다.

이런 성향은 이 회사만의 특징이 아니다. 학교에서 학생을 선발할 때도, 학교에서 교수를 선발할 때도, 판검사가 될 사람을 뽑을 때도, 회사에서 직원을 선발할 때도, 교수한테 연구비를 줄 때도 이런 정량적인 평가를 절대적이고도 공정한 것으로 여긴다.

반대로 많은 이들이 공정하고 기회가 많다고 생각하는 미국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보기에 상당히 불공정한 방식으로 의사를 결정하곤 한다. 사람을 뽑을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 가운데 하나가 추천서이고, 보통 어떤 자리든 알음알음으로 채용되는 게 일상적이다.

교수를 뽑을 때도, 그동안의 트랙 레코드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 사람일지 그 가능성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 한국의 괜찮은 학교라면 교수 자리를 잡을 수 없는 논문 실적으로 미국의 괜찮은 학교에서 교수 자리를 잡고 나중에 혁신적인 일을 해내는 사람을 적지 않게 보곤 한다.

사람의 판단, 직관, 직감에 대한 신뢰와 인정. 이게 자리잡지 않는 이상 앞서가는 사람을 빨리 쫓아가는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혁신성은 의외로 동물적인 직감(gut feeling) 같은 것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뭐 좋게 말하면 영감(intuition), 직관이나 통찰(insight) 같은 단어로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정량화, 계량화가 불가능한 어떤 “느낌”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상세하게 계획하고 치밀하게 준비하여 성공하는 방식은 fast follower가 되는 데 있어서는 상당히 효과적이었지만 아무도 가 보지 못한 길을 탐구하는, 혁신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는 전혀 효과적이지 않다.

연구 분야에서 좋은 관리자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훌륭한 두뇌와 열린 마음가짐을 갖추되 사람, 아이디어에 대한 gut feeling과 배짱을 겸비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직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두뇌, 자기 생각과 다른 주장도 수용할 줄 아는 열린 마음가짐, 좋은 사람, 좋은 아이디어를 알아채는 gut feeling, 주변에서 뭐라고 해도 일을 추진해나갈 수 있는 배짱, 이걸 모두 갖춘다면 정말 훌륭한 관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P.S.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MBO 방식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점은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적인 몰락에서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은가! 왜 굳이 망해버린 “계획경제”의 방식을 사익을 추구하는 최전선에 서 있는 사기업들이 그리 신봉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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