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아이들 재우느라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나는 혼자 부엌 식탁에 앉아 밀린 일을 좀 처리하고 있다. (부엌 식탁은 내가 가장 기분 좋게 일하는 장소 가운데 하나다. 내가 원하는, 벽을 마주하지 않으면서 내가 있는 공간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책상하고 비슷한 모양새를 갖췄기 때문인 듯하다.)

혼자서 물을 끓여서 라벤더 차를 우려 마시면서 찬장에 달려 있는, 입주할 때부터 그냥 거기 달려 있었던 시계 겸 라디오로 그냥 93.1에서 흘러나오는 윤디 리의 라 캄파넬라에 이어 벵게로프와 베를린 필/아바도의 차이코프스키를 듣고 있는데, 그 감흥이 비싼 오디오로 듣는 것 못지 않다.

큰 공 들여 듣는 음악 못지 않게 우연히 흘려듣는 음악이 큰 감흥을 안겨주는 것처럼, 한참을 공을 들여 준비하고 행하는 일 못지 않게 얼떨결에 스쳐지나가는 일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인생의 섭리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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