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로 찍은 필름 첫 롤을 현상하고 스캔해서 받아왔다.

초중고등학교 때 집에 있는 똑딱이 카메라로 사진을 많이 찍어보긴 했지만, 내가 직접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는 건 디카로 시작을 했다. 처음 샀던 카메라는 2001년 경에 구입한 캐논 IXUS-V라는 똑딱이 디지털 카메라였다. 막 디카가 유행하기 시작하던 시절에 남들보다 좀 빨리 디카를 구입했었다... 그리고 2004년 가을, 니콘 D70을 사면서 SLR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IXUS-V로 만 장 정도 사진을 찍으면 뭔가 깨달음이 올 거라는 사람들의 말에 계속 사진을 찍어 봤는데, 만 장이 넘어가도 깨달음은 오지 않는 듯 했고, 아웃포커싱해서 배경을 날린 사진을 찍고 싶어서 밝은 렌즈를 쓸 수 있는 SLR을 구입하고, 25000장에 가까운 사진을 찍었는데, 아직도 깨달음은 오지 않고 있다... 미적 감각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 우리 아기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 공부도 좀 시키고 그래야지...

어쨌든, 어렸을 적 아빠 카메라로 그냥 찍으면 찍히는 사진을 찍어본 이후로 필름으로 사진을 찍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사실 처음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FE에 필름을 넣고, 수동으로 초점을 잡고, 노출 등을 체크하면서 사진을 찍어 보는 건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리고 (인화는 안 했지만) 현상된 사진이 나오기 전까지 사진이 잘 나올까 하는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묘한 설레임도 디카로 사진을 찍을 때와는 매우 다른 경험이었고...

다행히도 노출이 잘못된 사진은 없었다. 노출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노출계가 읽어주는 대로 사진을 찍으니 별 문제 없는 사진이 나왔다. 플래시도 가이드 넘버 복잡하게 계산하지 않고 최신형 플래시의 기능을 믿고 자동으로 놓고 찍으니 적절한 광량으로 잘 터져 줬고...

하나 문제라면 플래시 동조 속도 1/125초를 믿고 찍은 사진 몇 장이 끝 쪽에 약간 노출이 덜 되어 나왔다는 것. 앞으로는 플래시 달고 찍을 때는 꼭 1/60초 이하의 셔터 스피드로 찍어야 할 듯하다. 105mm 렌즈 물려서 찍을 땐 플래시 쓰기가 곤란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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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n FE/ Nikon AF 50mm 1.4D/Metz 54MZ-4i/Fuji AutoAuto 200

스무 살이 훌쩍 넘은 카메라에 열 살이 안 된 렌즈를 달고, 서너 살도 안 된 플래시까지 달아놓으면 정말 이상한 느낌이 든다. 구세대와 신세대가 뒤섞인... 그래도 사진이 예상보다 잘 나와 매우 만족스럽다.
얼마 전에 필름 vs. CCD/CMOS에서도 계속 필름 바디에 눈이 간다고 쓰긴 했는데...
결국 지르고 말아 버렸다.
Nikon FE 사진

사진출처: Photography in Malaysia


사진에 있는 것과 같은 물건.
Nikon FE. 1972년에서 1983년까지 생산됐기 때문에 아무리 후기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나이가 스물 네 살이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롱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는지 아니면 전 사용자들이 곱게 써서인지 세월의 흔적은 꽤나 적은 편이다. 신동품 수준은 절대 아니지만 흠집도 별로 없고 찍히거나 찌그러진 부분도 없고, 스폰지들만 많이 눌려서 교체를 해 줘야 하는 수준... 스폰지는 실험실에서 굴러다니는 검은 압축 스폰지와 양면 테이프를 써서 교체해 줄 생각이다.

요즘 나오는 니콘 F-mount 렌즈도 어차피 대부분 (조리개 링이 렌즈에 달려 있지 않은 G 타입 렌즈랑 크롭 포맷에 맞춰 만들어지는 DX 렌즈는 제외) 쓸 수 있기 때문에 바디만 샀다. 지금 가지고 있는 렌즈 중 이 바디에 물려서 쓸 수 있는 렌즈는 AF 50mm f/1.4D 렌즈와 AF micro 105mm f/2.8D 렌즈 두 개. 아빠 번들만 DX 타입이면서 G 타입이라 쓰지 못한다. 아빠 번들은 어떻게 보이는지 한 번 마운트해 보니, 전 구간에서 고르게(ㅠㅠ) 비네팅이 심하게 발생하더만...

토요일날 거래를 하고 나서 렌즈 마운트도 해 보고 공셔터도 날려보고 하다가 일요일 오후에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필름을 파는 곳을 찾아보니, 정말 요즘은 동네 슈퍼에서 필름 사기도 힘들다. 오토오토 200 36방짜리를 (그것도 유효기간 좀 지난 걸) 3200원이나 주고 구입. 동네에서 좀 찍고, 집 안에서도 좀 찍었다. 집 안에서는 셔터스피드가 안 나와서 플래시(D70용으로 산 메츠 54MZ-4i)를 달고 플래시를 오토 모드로 해 놓고 ISO, 렌즈 초점거리, 조리개값 일일이 수동으로 넣어줘 가면서 사진을 찍어봤는데, 디카처럼 바로바로 확인이 안 되니 상당히 답답하다. D70에 달아서 찍을 때도 오토 모드로 찍으면 꽤 잘 찍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i-TTL로 찍는 것보다 낫기도 한 듯) 이번에도 굳이 가이드 넘버랑 거리 계산해서 조리개 수치 조절하거나 광량 조절하는 방법을 쓰지 않고 과감하게 오토 모드로 찍어 버렸는데, 과연 잘 나올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하진이 쓰던 수동 플래시 보면 플래시 뒤쪽에 iso 값, 거리별로 조리개 수치가 적혀있는 것 같았는데, 요즘 나오는 자동 플래시에는 그런 표 같은 게 적혀 있을리 만무하다... 오토 모드로 플래시 터뜨린 사진이 영 좋지 않으면 대략 낭패...

디카로 찍을 때는 정말 사진을 마구마구 찍어댔는데, 필름은 아까워서 그렇게 하질 못한다. 게다가 바로 확인도 안 되니 참 불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이라는 것이 무서워서, 사진 찍고는 조금 구도를 바꿔서 다시 셔터를 누르려다가 (필름 로딩이 수동이기에) 셔터가 안 눌리는 걸 발견하거나, 사진 찍고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어 무의식적으로 카메라 뒷면을 바라보고는 아무것도 없음에 당황하곤 한다. 정말 DSLR하고 느낌 차이가 많이 안 나는 F80, F100이나 F5, F6 같은 필름 바디 쓰는 사람들이 다른 DSLR 쓰는 사람한테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면 세 장씩 찍어버리고는 바디 뒷면 바라보고 "어, 필름이네"라고 놀란다는 하소연에 공감이 간다...

마음이 급해서 학교 후생관 사진부에 현상+스캔을 맞겼는데, 5500원이나 달란다. 첫 롤이 그렇고, 여러 롤을 맡기면 두 번째 롤부터는 2500원씩이라는데, 지금이야 워낙 사진을 보고 싶은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거고, 담부터는 코스트코 가서 1500원에 현상+스캔해 주는 걸 활용해야지... 코스트코는 지금까지 총 세 번 연회비를 냈는데, 본전을 제대로 뽑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회원 가입하고 1년에 많아야 3-4번 가서 쇼핑한 듯... 필름 바디를 영입했으니 앞으로 자주 현상+스캔해서 본전 좀 뽑아봐야지...

학교에 와서는 또 다른 걸 지르고 말았다. 필름 바디를 샀으니 필름을 사야 사진을 찍을 것 아닌가... 이왕 사는 거 남들이 좋다는 거 왕창 질렀는데, Fuji Pro 400H(NPH400 후속) 세 통, TMY400(TMax 400) 두 통, 포트라 160VC 세 통, 리얼라 세 통... 이렇게 총 열한 통이나 되는 필름을 질렀다. 거기다가 필름 바꿔가면서 찍을 일에 대비(?)해서 필름 피커까지 한 개 장만. 총 52700원이나 쓰고 말았다.

이 정도면 올 연말까지는 쓰고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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